사랑을
찾아 돌아온 이승
그녀가 안내한 곳은 신당이
아니었다.
연못의 물이 댓돌 아래까지 차 있는
음식점이었다.
한식 음식점은 홀이
없었다.
크고
작은,
아늑하게 꾸며진
방마다 손님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 탓일까.
조용한 분위기에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신당에는 언제 가요?”
연잎이 무성한 연못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투로 물었다.
“신당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인사드려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르신들에게 무례한 사람을 어떻게
인사시켜요?
다음에
해요.”
천녀는 인사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때란 어르신들이
부르는 시간이라고 했다.
원하지 않는데
인사하겠다고 버릇없이 들어가면 돌아앉으신다고 했다.
인사하러 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 어르신들이 예뻐해 주신다고 했다.
“오늘은 나랑 밥이나
먹어요.”
천녀의 말에 은근히 약이
올랐다.
차분히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척 하면서 행동은 자기 마음대로 했다.
사람의 감정도 조였다
폈다 조절하며 이쪽의 속사정은 슬금슬금 캐내갔다.
진작 그 눈치를
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모르는 척 따르면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천녀와 식사를 한 후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승의
사람에서 저 세 살의 혼백이 되기 전까지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걸러오기도 했지만 한 번도 신당에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요구는 없었다.
신당에 인사를 올리는 것은 그녀가 모시고
있는 할아버지들의 보호에 들어가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거기에 얼마간의 돈이
들어가겠지만,
경기에서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주일 후에 경기 있죠?”
죽기 하루 전이었다.
천녀는 새벽에 전화했다.
어르신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하란다며,
매일 새벽 우승축원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지난번 소백산으로
기도 갔을 때 어르신들 앞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고 했다.
그때 어르신들이 좋은
운이 많이 남았다며 우승도 따놓은 단상이라고 했다.
다만 본인이 침착해야
하는데 경기 때마다 스스로 망친다며 안타까워했다.
고 하는 말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우승의 운을 스스로
놓친다는 말에 굉장히 힘이 실렸다.
침착하게 경기를
운영하면 우승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 커다란 믿음으로 밀려왔다.
우승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그날은 다른 날보다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명상의 시간도
늘렸다.
오후 늦게 훈련을
마친 후 우승의 자기체면을 끝없이 걸며 집으로 돌아왔고,
좋아하는 밤참도 먹지
않았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다
정신과의 처방을 받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우승의 집념을 풀지 않았다.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집념이었다.
죽은 나의 모습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조용히,
숨소리도 없이 자는
얼굴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깨울 때까지 마냥 자는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왜 죽였을까?
무엇 때문에 죽였을까?
누가 신경안정제에 죽음의 약을 섞어
놓았을까?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의심이 갈 만한
누군가를 찾아보았지만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슬퍼하며
국화를 바치거나 절을 한 후 어머니 아버지를 위로했다.
범죄자는 범행현장에
반드시 나타난다지만 장례식장 어디에도 그럴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문상객이 있었지만,
그들은
펜이었다.
펜을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나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었다.
(다음 호에
계속)
소설가
정병국
1947년 8월 춘천에서 태어났다.
일간 내외경제,
코리아헤럴드 등
언론사와 출판사에 근무하며 ‘인조인형의 집’,
‘안개비’,
‘외다리
춤’,
‘침묵하는
여자’,
‘황사바람’,
‘꿈을 줍는
여자’,
‘타인의
얼굴’
등 다수의
장·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작품집으로는 에세이집
사부곡(思父曲)
‘귀가 머니 세상이
조용해서 좋구나’,
장편소설집
‘가슴속으로 흐르는 강’,
‘이혼의
진실’
등이
있다.
현재 도서출판
‘지식과 사람들’
대표로,
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